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투알 개선문 (문단 편집) == 역사 == 에투알 개선문은 1806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연합군을 격파하는 데에 성공한 직후, 나폴레옹에 대한 지지가 그 정점에 달했을 때에 지어지기 시작하였다. 프랑스의 승리에 고무된 파리의 시민들은 나폴레옹의 업적에 걸맞은 거대한 기념물을 짓고자 하였고, 이로 인하여 새로운 개선문 건설이 의회에서 결의된 것이다. 워낙 거대한 대공사였기에 지면을 다지는 데에만 2년이 걸렸고, 이때문에 정작 나폴레옹이 1810년에 [[마리 루이즈]] 여대공을 데리고 파리로 개선하였을 때에는 제대로 공사를 시작하지도 못한 터였다. 결국 나폴레옹이 개선식을 치를 때에는 나무로 완성된 개선문의 형태를 그 자리에 세워서 이를 이용하여 개선식을 진행했다. 1811년에는 공사를 총감독하던 장 샬그랭이 사망했고, 그의 뒤를 이어 장 니콜라스 휴요트가 공사 총감독이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황제는 개선문의 건설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개선문 공사 지연을 문제 삼으며 건설을 독촉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승승장구도 잠시,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 군대가 [[호레이쇼 넬슨]] 제독에게 대패하고 나폴레옹의 인기가 점차 시들해지자 나폴레옹을 기리기 위한 목적이었던 개선문 공사도 점차 시들해졌다. 결국에 나폴레옹이 엘바 섬으로 유폐되고, 쫒겨난 [[부르봉 왕가]]가 돌아와 [[부르봉 왕정복고]]가 이루어지자 개선문 건설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부르봉 왕가의 새로운 국왕이었던 [[루이 18세]]는 개선문 건설에 관심도 없었고, 혁명 전후 혼란스러운 프랑스 정계 탓에 이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다. 이후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기적적으로 돌아와 왕위를 되찾기 위하여 부르봉 왕가의 루이 18세를 몰아내려 들었으나, 또다시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에 완벽하게 유배되면서 나폴레옹이 꿈꾸던 그의 치세 하에서의 개선문 완공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1840년에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 섬에서 죽은 뒤, 그의 시신이 파리로 운구되어 4년 전 완공된 개선문을 통과하였으니 죽어서라도 자신을 위해 지어졌던 개선문을 통과하겠다는 소원은 풀었다 할 수 있겠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napoleonfuneral.png|width=100%]]}}} || || 개선문 아래에서 치러지는 나폴레옹의 장례식 그림을 컬러로 복원한 모습.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 개선문 꼭대기에 금색 동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이는 1806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독일(당시 프로이센)에게 승리한 프랑스군이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가져온 황금 사두마차상이다. 이후 독일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하자 이 동상을 도로 되가져 가서 지금은 현재처럼 텅 비게 되었다. 한편 사두마차상을 다시 가져간 독일은 이를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 다시 올려 놓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 와중에 폭격으로 파손되었다가 종전 후 복원되었다. || 1916년에는 [[베르됭 전투]]가 치러지기 바로 전날에 개선문이 들고 있던 검이 부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정부가 사회적 파장을 우려하여 바로 치웠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1919년 8월에는 찰스 고드프로이라는 이름의 비행사가 개선문 사이의 아치를 비행기를 몰아 성공적으로 통과하면서 상당한 명성을 얻기도 했다. 이게 당시로서는 대단했던 것이, 아치의 너비는 14m, 높이는 30m도 채 되지 않았는데 꽤 큰 부피의 [[복엽기]]를 몰고 이에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장 나바르라는 비행사도 이를 시도하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숨지기도 했다. 개선문은 건설 이후부터 쭉 그 목적에 맞게 프랑스 군인들이 개선식을 치르는 장소, 그리고 매년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 기념 퍼레이드 장소로 자리매김하였다. 다만 프랑스 군대만이 이 곳에서 개선식을 치른 것은 아니라서, [[보불전쟁]] 패전 직후 프로이센이 에투알 개선문에서 개선식을 열었다. 정작 프랑스는 에투알 개선문에서 개선식을 한적이 없었던지라 [* 개선식을 할만한 대형전쟁이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없었다. 상술했듯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완공되었던지라….] 어떻게든 막아보겠다고 개선문 아래에 바리케이드를 쳐서 프로이센 보병대가 개선문을 통과하지 못하게 한건 성공했지만. 기병대 선두 일부가 바리케이드를 무시하고 꿰뚫어버렸다고. 그 다음엔 [[나치 독일]]이 1940년에 이 곳에서 [[아돌프 히틀러]]가 바라보는 앞에서 거대한 군대 개선식을 치른 바가 있다. 이 개선식은 아직까지도 사진과 기록이 무수히 남아있을 정도로 성대히 치러졌으며,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혔다. 다만 프랑스 군대가 2차 세계대전 후반인 1944년에 파리 수복에 성공하고 8월 29일에 [[미군]]과 함께 다시 개선문 아래에서 개선식을 치르면서 이 자존심을 조금 회복하기는 했다. 그래봤자 일부지만. 참고로 개선식을 진행할 때에는 [[기사도|아치 바로 아래에 묻혀 있는 무명용사들의 묘 때문에 이를 밟고 지나갈 수는 없다는 이유로]] 아치 자체를 통과하지는 않으며, 대신 개선문 주변의 환상도로를 크게 한바퀴 도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심지어 히틀러도 이 전통을 존중했다.[* 다만 이건 히틀러가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안그래도 적개심이 가득한 프랑스인들이 무명용사들의 묘를 짓밟으며 행군하는 나치 군인들을 보고 무슨 짓을 할지 몰랐던 점도 있다. 나름 신사적이라는 평도 들을 수 있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parisnaziarc.jpg|width=100%]]}}}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parisliberation.jpg|width=100%]]}}} || || 1940년 파리 점령 후 개선식을 진행하는 [[독일 국방군]]의 모습 || 1944년 파리를 해방시킨 후 개선식을 진행하는 [[연합군]]의 모습 || 종전 후에도 개선문은 세계대전 종전 기념일이나 국가기념일 등 대규모 행사에 주로 등장하면서 프랑스의 상징으로 굳게 자리매김했다. 다만 60년대에는 도로 차량들의 매연 탓에 하얀 개선문의 석재들이 지나치게 검은색으로 변색되어 나중에 한 번 대규모 청소 작업을 실시한 적도 있었다. 1995년에는 알제리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에서 개선문 주위에 폭탄을 설치하여 17명의 중상자가 발생한 적도 있다. 같은 해의 프랑스 전승기념일(2차대전 유럽전선 종전일, 일명 V-데이)에는 프랑스측에서 '''독일 연방군을 초청'''해서 프랑스군과 함께 독일 육군 군악대가 개선문에서 행진하는 일이 있었다. 한편 2018년에 일어난 [[노란 조끼 운동]]으로 인하여 경찰과 시위대가 충돌하면서, 이때 개선문 일부가 조금 파손되었다고 한다. 2021년에는 설치미술가 크리스토 자바체프(1935∼2020)의 유작으로 포장이 이뤄지기도 했다.[[https://m.yna.co.kr/view/AKR20210918051300081?section=international/al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